[Dispatch=김지호·구민지기자] 1998년, 5월의 어느 날.
“뭐! 야반도주를 했다고?”
A씨는 털썩 주저앉았다. “도망갔다”는 그 전화에 무릎이 풀린 것. 그는 정신을 차린 뒤, 그 집으로 뛰어갔다.
B씨 역시 마찬가지. “야반도주를 했다”는 전화에 이성을 잃었다. 그는 맨발로 뛰쳐나갔고, 그 집에 도착했다.
“집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광경이었죠. 말로만 듣던 야반도주.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A·B씨)
A씨는 “그 때가 초여름이었다. 그런데 겨울옷까지 챙겨서 도망갔다”고 떠올렸다. 한국의 여름은 뉴질랜드의 겨울이다. 두 나라의 계절은 반대다.
B씨는 “방바닥에 영어교재가 있었다. 도망치기 전까지 영어공부를 한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실제로 S씨의 아들 셋은 꾸준히 영어 과외를 받고 있었다.
A씨와 B씨는 말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계획한 것 같았어요. 집에 뉴질랜드와 사이판 관련 책들이 많더라고요. 약국에서 애들 약을 엄청 사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미리 준비했던 겁니다.”
‘디스패치’는 충북 제천으로 갔다. 정확히, 송학면 무도리다. 이곳은 ‘마이크로닷’ (본명 신재호)의 고향. 그곳에서 마이크로닷의 부모에게 사기를 당한 A씨와 B씨를 만났다.
신 씨 가족의 야반도주를 직접 본 C씨와도 통화했다. 그날 새벽의 일을 목격한 당사자다. 현재 외국에 살고 있는 D씨와도 어렵게 연결됐다. 그의 아버지가 입은 피해액은 1억 8,000만 원.
그리고, 피해자들이 20년 동안 보관하고 있던 <민원사건 처리결과 통지서>를 입수했다. 1998년과 1999년 경찰이 보낸 사건 처리 결과서였다.
♦ 그 도주를 똑똑히 기억한다
먼저, C씨의 이야기다. 그는 어린 시절을 큰아버지 집에서 보냈다.
“야반도주요? 그건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봤으니까요.”
C씨는 그날 새벽 잠에서 깼다.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열었다. 그때, 신 씨 가족의 도주를 목격했다.
“시골은 화장실이 밖에 있잖아요. 소변이 마려워서 나왔는데 수십 대의 트럭이 지나가는 걸 봤습니다. 그 안에는 젖소들이 있었고요. 다음 날 온 동네가 난리가 났죠.”
C씨에 따르면, 큰아버지와 신 씨(마이크로닷 아버지)는 죽마고우였다. 그래서 (신 씨) 빚보증을 섰다. 큰아버지는 그 일로 억대의 피해를 입었다.
S씨의 야반도주는 지역신문에도 보도됐다.
“충북 제천시 송학면 무도1리 낙농가 신 모씨(41)가 1998년 5월 31일 젖소 85마리와 트랙터를 처분하고 잠적해버렸다. 신 씨가 원유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사료비 상승에 따른 부채 해결이 어려워지자 잠적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신 씨의 정부 지원금 연대보증을 서준 낙농가들을 상대로 자금 회수에 들어갔다.” (중부매일)
♦ 사료비 상승은 핑계에 불과하다?
D씨의 아버지는 사료사업을 했다. 당시 그는 대학생이었다.
“부모님은 사료사업을 하셨어요. 저는 직접 배달을 하며 (부모님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합니다.”
‘마이크로닷’의 아버지는 목장을 운영했다. 젖소 85마리를 키우는 낙농업자였다. 그는 D씨 아버지에게 젖소 사료를 공급받았다.
“부모님은 신 씨와 15년 정도 거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도주하기 6~7개월 전부터 사료를 엄청나게 사갔습니다. 워낙 오래 거래를 했기에 의심하지 않으셨고요.”
하지만 외상값은 눈덩이처럼 쌓였다. D씨는 “원래 6,000만 원 정도였는데 (도망 직전) 1억 8,000만 원까지 늘었다”면서 “갚겠다는 말만 반복하다 갑자기 소를 팔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D씨는 당시 제천 사람들 10여 명 이상이 고소한 것으로 기억했다. ‘마이크로닷’의 어머니 김 씨는 곗돈까지 챙겨서 달아났다는 후문. ‘디스패치’는 당시 계원이었던 A씨를 직접 만났다.
♦ ‘마이크로닷’의 어머니는 계주였다
A씨는 친목계의 계원이었다. ‘마이크로닷’의 어머니 김 씨는 매달 50만 원씩 20개월을 내는 계를 운영했다. 계원은 대략 15명 정도로 파악된다.
A씨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죠. 아들 셋이 (사촌에게) 영어과외를 받고 있는 걸 목격한 사람도 있었고요. 그날 밤에 도망갈 사람이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A씨가 빌려준 돈은 대략 2,500만 원 정도다. 김 씨를 믿었기에 현금으로 줬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속수무책. 수사결과는 기소중지였다. 피의자 소재불명, 즉 찾을 수 없다는 통보만 받았다.
“차용증을 쓰지 않고 빌려준 사람이 많아요. 200~300 소액부터 2,000~3,000 고액까지 다양했죠. 여러 명이 고소를 진행했지만 진척이 없었습니다. 행방을 모른다는 답변만...”
A씨는 또 다른 주민들의 피해도 전했다. 식당을 하는 E씨, 공무원 아내 F씨, 의사 부인 G씨 등을 거론했다. (E, F, G씨 등을 연락이 닿지 않아 만나진 못했다)
♦ 그렇게,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마이크로닷’ 가족의 야반도주는 잔혹했다. 마을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됐다.
신 씨의 친구들은 주로 목축업을 했다. 그들은 연대보증에 덜미를 잡혔다. 연쇄도산했다. ‘디스패치’가 만난 B씨 역시 낙농업에 종사했다.
“원래 목장들은 서로 연대보증을 많이 합니다. 젖소 목장은 (겨울에 대비해) 풀을 미리 쟁여 둬야 하거든요. 사료 비용도 1달에 500여 만원 정도 들고요. (정부 대출을 위해) 연대보증이 필요하죠.”
B씨의 남편은 신 씨와 학교 동창이다. 그래서 연대보증도 섰다. 하지만 부메랑이 됐다. ‘마이크로닷’ 가족이 도주한 이후, 그 빚을 고스란히 지게 됐다.
“신 씨의 정부 대출금은 고스란히 우리 집의 빚이 됐습니다. 그 빚을 갚느라 목축업까지 정리했죠. 더 서글픈 건, 그 이후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됐어요. 주위 모든 관계가 깨졌습니다.”
B씨에 따르면, 신 씨는 주변 친구들의 돈을 꽤 많이 끌어모았다. '내가 3부 이자를 줄 테니 소문 내지 말라'며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다는 것. 1998년, 제천 낙농가 연쇄도산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 그들은 떠났고, 남은 자는 곪았다
“저희 큰아버지는 제천에서 젖소 목장을 크게 운영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크로닷 부모가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목장을 정리하고 사라졌죠. 저희 집안도 빚보증을 서준 상태였고요. 그 때문에 힘들었던 과거가 있습니다.” (제보자-C씨 가족)
“(부모님이) 뉴질랜드에서 사기를 당해 수제비만 먹었다고 한탄하더군요. 그래서 어렵게 자랐다고요. 더 이상 피해자 코스프레는 안 했으면 합니다. ‘마닷’ 부모 때문에 고생하신 제 부모님, 그리고 다른 피해자분들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니까요.” (제보자-B씨 가족)
‘디스패치’가 만난 지역 주민들은 20년 동안 응어리를 품고 살았다. B씨는 현재 암투병중이다. D씨의 어머니 역시 암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있다.
물론, 신 씨 일가의 도주와 피해자 가족의 병이 인과관계를 갖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남은 사람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까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걸 잃은 느낌? 친구라서, 이웃이라서, 그래서 믿은 죄 밖에 없는데...”
‘마이크로닷’의 잘못은 아니다. 그 부모가 저지른 일이다. 피해자들 역시 알고 있다. ‘6살’ 꼬마가 무엇을 알겠냐고. 그래서 (어른들은) 지금까지 참아왔다.
그러나, 그의 대응은 예상 밖이었다. 사실무근 및 법적조치.
“이제 와서 그 돈을 받는다고 20년 한이 풀릴까요?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피눈물이 그의 성장에 토대가 됐다는 것.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생각한다면요.”
마이크로닷이 노래했다.
<그때 수제비만 먹다 이젠 맛집만 찾으러 다니네. 엄마는 사장됐네. 운영하기 제일 크고 핫한 한식 부페. 아빠도 사장님. 작년에 10억의 매출을 확 넘겼네.> (ft 마이크로닷)
<사진=이승훈기자>